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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관예우 는 한국 법조계 존재하는가?

by 솔요다 solyoda 202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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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는 시간의 양이 아니다

일은 왜 끝나지 않는가: 착한 사람 콤플렉스의 함정


"You teach people how to treat you by what you allow, what you stop, and what you reinforce."

– Tony Gaskins

“당신이 허용하고 멈추고 강화하는 방식이, 타인이 당신을 대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끝없는 업무 속에 스스로를 몰아넣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내 첫 직장이 전공과 전혀 무관한 “법률 분야”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매일이 새로웠다.

법률 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배우는 과정이 즐거웠다.

단순한 업무 처리에 그치지 않고, 법조문을 직접 읽고 사건에 적용해보는 경험은

나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그 배움의 갈증은 결국 직장과 대학을 병행하는 삶으로 이어졌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전문성은 자라났다.

 

하지만 동시에, 조용한 불안도 함께 자랐다.

법학은 평생 공부가 필요한 영역이다.

삶 전반에 닿아 있는 만큼, 공부하면 할수록 복잡하고 더 깊은 사고가 필요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법은 지식이 아니라 ‘권력’과 ‘해석’의 문제가 되어 있었다.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종종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관예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퇴직한 판사나 검사가 로펌에 들어가, 이름 하나만으로 사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나는 그걸 “전관비리”라고 부르고 싶다.

법이 특정 집단의 도구가 되는 순간, 그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역사는 그런 사회에 늘 경고를 보내왔다.

나는 그 경고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했고, 계속 배웠고, 나의 실력을 다듬었다.

 

법조계에 오래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한 번 해보면, 어떤 사건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소송은 복잡하고 방대하지만, 결국은 판례와 구조의 세계다.

핵심 원리만 꿰뚫는다면, 낯선 사건도 대응할 수 있다.

나는 문제를 해결했고, 동료와 사회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그래서 ‘잘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조용한 질문이 생각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일을 왜 계속하고 있지?”

“이 일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가 되지?”

생산성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그렇게 찾아왔다.

성과를 내고 있는데, 왜 마음 한쪽은 비어 있는 걸까?

 

착한 사람 콤플렉스의 함정을 기억해보자.

우리는 종종, 착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일에 가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가 할게요”라고 나서고,

“그건 제가 더 잘 아니까 처리할게요”라며 책임을 떠안는다.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의 칭찬 한 마디에 모든 걸 걸고 싶어진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 말은 맞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칭찬은,

스스로를 묶는 덫이 되기도 한다.

 

칭찬을 받기 위해 자기 삶의 주도권을 내어주는 순간, 그 일은 더 이상 생산이 아니라 자기소모가 된다.

이제는 자신을 위한 기록이 필요하다.

이제는 당신 자신을 위한 일, 당신만의 기준으로 남기는 기록이 필요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나는 단언컨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당신 역시 당연하게 여겨온 삶의 흐름과 일의 방식에 조용히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있지?”

“내가 일에서 진짜로 원하는 건 뭘까?”

 

그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된 것이다.

그건 무력감도, 회피도 아니다.

그건 당신이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생각하는 힘.

바꿔낼 수 있다는 힘.

그 힘이 당신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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